1970년대 대한민국 가요계를 풍미했던 인기가수 옥희(본명 김광숙)가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출중한 외모와 독보적인 가창력으로 큰 사랑을 받았던 고인의 별세 소식과 발자취를 정리한 상세 프로필입니다.

1. 별세 및 장례 정보
- 별세 일시: 2026년 6월 20일 오후
- 향년: 73세
- 사망 원인: 신장암 투병
- 임종 장소: 경기도 수원시 소재의 한 호스피스 병동
- 장례 형태: 대한가수협회장
- 빈소: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호실
- 발인: 2026년 6월 25일
고인은 지난해(2025년) 신장암 진단을 받은 후 치료를 이어왔으나, 끝내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남편 홍수환을 비롯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들었습니다. 올해 투병 중인 와중에도 KBS '가요무대'에 출연하는 등 노래를 향한 멈추지 않는 열정을 보여주어 음악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2. 기본 인적 사항 및 프로필
- 본명: 김광숙 (金光淑)
- 초기 영어 예명: 키티 킴 (Kitty Kim)
- 출생: 1953년, 서울특별시
- 사망: 2026년 6월 20일, 경기도 수원시
- 학력:
- 서울 배화여자중학교 (졸업)
- 서울 배화여자고등학교 (졸업)
- 데뷔: 1974년 노래 '나는 몰라요'
- 종교: 개신교 (감리회, 동춘교회 권사)
- 가족 관계:
- 배우자: 홍수환 (복싱 세계 챔피언 출신, 1950년생)
- 자녀: 슬하 1남 1녀

3. 주요 생애 및 가요계 발자취
3-1. 미국 활동과 가요계 데뷔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나 배화여중과 배화여고를 졸업한 고인은 학창 시절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보였습니다. 졸업 이후 이모의 소개로 당대 최고의 작곡가이자 음악가인 이봉조와 김희갑에게 발탁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를 계기 삼아 미국으로 건너간 고인은 '서울시스터즈' 밴드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해외 무대에서 먼저 실력을 다졌습니다.
3-2. 1970년대 전성기
미국 활동을 마친 후 한국으로 돌아온 고인은 작곡가 김희갑에게 받은 곡 '나는 몰라요'(1974년)를 발표하며 국내 가요계에 정식 데뷔했습니다. 특유의 시원시원한 가창력과 세련된 무대 매너, 뛰어난 외모가 시너지를 내며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이듬해인 1975년에는 공로를 인정받아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10대 가수상을 수상하며 당대 최고 여가수 중 한 명으로 입지를 굳혔습니다. 이후 '이웃사촌'(1977년) 등 발표하는 곡마다 연이어 히트시키며 1970년대 대중음악 트렌드를 이끌었습니다.
3-3. 결혼과 공백기, 그리고 복귀
한창 전성기를 누리던 중 프로복싱 세계 챔피언 출신인 홍수환과 결혼하게 되면서 가요계 활동을 잠정 중단했습니다. 한동안 대중 앞에 서지 않고 개인 사업에 전념했으나, 음악에 대한 갈증을 지우지 못하고 2003년 '소설같은 사랑'을 발표하며 26년 만에 가요계로 전격 복귀했습니다. 복귀 이후에도 '돈 때문에', '인생열차' 등 꾸준히 신곡을 발표하고 무대에 오르며 트로트 가수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4. 주요 디스코그래피 (발매 앨범)
- 1974년 《나는 몰라요》 (데뷔곡)
- 1975년 《어쩌면 좋아 / 눈으로만 말해요》
- 1976년 《Greatest Hit》 / 《어디에 있을 것 같아》
- 1977년 《두 손을 잡아요》 / 《이웃사촌》 (히트곡)
- 1981년 《옥희의 꿈》
- 1983년 《옥희 신곡모음》
- 1985년 《아내의 일기》
- 1996년 《카페여왕 2》
- 2003년 《소설같은 사랑》 (복귀작)
- 2007년 《돈 때문에》 / 《Invite》
- 2017년 《인생열차》
5. 주요 수상 경력
- 1975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 — 10대 가수상
- 2015년 제2회 LMBA 스타 시상식 — 대중가요공헌상

6. 방송 활동 및 다재다능했던 면모
옥희는 본업인 가수 활동 외에도 특유의 거침없고 시원시원한 입담, 다정한 성품으로 방송가에서 러브콜을 받는 전천후 엔터테이너였습니다.
7-1. 예능 및 교양 프로그램에서의 활약
- 부부 토크쇼의 단골 게스트: 홍수환과의 재결합 이후 두 사람은 부부 동반 예능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옥희는 남편 홍수환의 무뚝뚝한 면을 세련되게 꼬집으면서도, 남편의 건강과 명예를 누구보다 챙기는 현명한 아내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 인생 스토리의 고백: 채널A '행복한 아침', 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 등의 프로그램에 출연해 파란만장했던 70년대 연예계 비화, 미국 활동 시절의 고생담, 그리고 이혼과 재결합 과정에서 겪었던 심적 고통을 담담히 고백하며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습니다.
7-2. 요리 및 사업가로서의 역량
가요계를 떠나있던 공백기 동안 고인은 요리 솜씨를 살려 대형 음식점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방송에서도 종종 뛰어난 요리 실력을 선보였으며, 동료 연예인들을 집으로 초대해 따뜻한 밥상을 차려내기를 좋아했던 다정다감한 큰언니 같은 존재였습니다.

8. 신앙생활과 사회공헌
인생의 거친 풍파를 겪는 동안 고인에게 가장 큰 버팀목이 되어준 것은 종교(개신교)였습니다.
- 동춘교회 권사 임직: 고인은 경기도 인천에 위치한 동춘교회에서 꾸준히 신앙생활을 이어오며 '권사' 직분을 받았습니다. 화려한 연예인의 삶 뒤에 찾아오는 공허함과 투병의 고통을 기도로 극복하고자 노력했습니다.
- 찬양 및 간증 집회: 남편 홍수환 장로와 함께 전국 각지의 교회와 선교 단체를 다니며 ' 고난을 축복으로 바꾼 부부의 이야기'를 주제로 간증 집회를 열었습니다. 복음성가(CCM) 음반을 내거나 찬양 무대에 서며 소외된 이웃과 낙심한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활동에 앞장섰습니다.
9. 마지막 투병 생활과 가요계의 애도
2025년 청천벽력 같은 신장암 진단을 받은 후에도 고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늘 밝은 모습을 유지하려 애썼습니다.
9-1. 무대를 향한 마지막 투병 투혼
고인은 몸 상태가 급격히 악화하는 와중에도 자신을 기억해 주는 팬들을 위해 마이크를 놓지 않았습니다. 올해(2026년) 초까지도 전통 있는 가요 프로그램인 KBS '가요무대'에 출연해 전성기 못지않은 울림 있는 목소리로 무대를 소화했습니다. 당시 무대는 고인이 대중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이자 아름다운 작별 인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병세가 걷잡을 수 없이 중해지면서 수원에 위치한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져 품위 있는 임종을 준비했습니다.
9-2. 문화예술계와 팬들의 추모 물결
고인의 별세 소식이 전해진 후, 대한가수협회를 비롯한 음악계 선후배들의 애도 행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 대한가수협회장으로 치러지는 장례: 가요계에 기여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장례는 엄숙하게 대한가수협회장으로 진행됩니다. 후배 가수들은 "70년대 가요계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선구자이자, 후배들을 늘 따뜻하게 안아주던 어머니 같은 선배님을 잃었다"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 남겨진 이들의 슬픔: 오랜 세월 고난과 영광을 함께해 온 남편 홍수환은 빈소를 지키며 깊은 슬픔에 잠겨 있는 것으로 전해져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10. 후세에 남긴 음악적 유산과 평가
가수 옥희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미국 팝 음악의 감성을 한국적 트로트와 가요에 가장 성공적으로 이식한 보컬리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데뷔 초기 '서울시스터즈' 활동을 통해 다진 탄탄한 소울(Soul)과 리듬앤블루스(R&B)적 발성은 당시 천편일률적이었던 국내 여가수들의 창법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대표곡 '나는 몰라요'에서 보여준 콧소리 섞인 애교 있으면서도 파워풀한 가창력, '이웃사촌'에서 보여준 경쾌하고 대중적인 리듬감은 시대를 앞서간 감각이었습니다.
인생의 수많은 굴곡 속에서도 음악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무대 위에서 아름답게 빛났던 가수 옥희. 그가 남긴 명곡들과 뜨거웠던 삶의 궤적은 대한민국 대중가요사와 팬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디바의 명복을 빕니다.